좌의정(左議政)  김상헌(金尙憲)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 등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570년(선조 3) 6월 3일에 서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에는 어머니가 임신한 지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김극효(金克孝 1542〜1618.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는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양구(楊口)ㆍ동복현감(同福縣監)ㆍ금산군수(錦山郡守)ㆍ돈녕부 도정ㆍ동지돈녕부사 등 주로 외직이나 중앙의 한직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성세는 대단했다. 우선 외조 정유길(鄭惟吉 1515∼1588. 본관 동래)은 좌의정을 역임한 당시의 대표적인 대신이었다. 정유길의 조부는 중종 중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고 증조는 성종 때 이조ㆍ공조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좌리(佐理)공신에 책봉된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었다.

후손들도 매우 뛰어났는데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鄭昌衍 1552∼1636)은 좌의정 손자 정광성(鄭廣成 1576∼1654)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에도 이 지파에서는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영의정) ㆍ정치화(鄭致和 1609∼1677. 좌의정)ㆍ정만화(鄭萬和 1614∼1669. 이조참판)ㆍ정재숭(鄭載嵩 1632∼1692. 우의정)ㆍ정석삼(鄭錫三 1684∼1729. 호조참판)ㆍ정홍순(鄭弘淳 1720∼1784. 우의정) 등 조선 후기의 주요한 대신을 여럿 배출했다.

조선 중기부터 종통(宗統: 종가 맏아들의 혈통)이 중시되면서 양자 입적이 활발해지는데 김상헌은 자신이 입적되고 후손도 입적시키는 이례적인 경험을 모두 겪었다. 그는 2세 때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 1531〜1572)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별세하자 그에게 입적되었다(1572년〔선조 2〕). 9세부터 친부에게서 글을 배웠고(1578년〔선조 11〕) 12세 때는 천연두에 걸려 아주 위독했다가 이듬해에야 간신히 나았다(1582년〔선조 15〕). 그 뒤 김상헌은 15세 때 성주(星州) 이씨(선전관 이의로〔李義老〕의 딸)과 혼인했고(1585년〔선조 18〕) 5년 뒤인 20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1590년〔선조 23〕).

그가 겪은 첫 번째 큰 전란인 임진왜란은 아직 출사하기 전인 22세 때 발발했다.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했다가 겨울에 강화를 거쳐 충청남도 서산(瑞山)으로 갔다. 이때 아들 종경(宗慶. 1589년〔선조 22〕 출생)이 3세로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전란의 와중인 1596년(선조 29) 가을에 김상헌은 과거에 급제해(19명 중 13등)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했다. 길고 화려했지만 당시의 주요한 인물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험난한 관직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선조가 붕어하는 1608년까지 10여 년 동안 김상헌은 이런저런 중하급 관직을 거쳤다. 중앙에서는 저작ㆍ박사ㆍ예조ㆍ이조좌랑ㆍ부수찬ㆍ지제교ㆍ정언ㆍ예조정랑 같은 청요직에 근무했고 외직으로는 제주 안무어사(按撫御史)ㆍ함경도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ㆍ경성판관(鏡城判官)ㆍ개성부 경력 등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 부기할 사항은 두 가지인데 우선 1602년(선조 35)에 고산도 찰방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먼 외직에 발령된 것은 당시 실세였던 유영경(柳永慶 1550∼1608)과의 알력 때문이었는데 앞서 그가 대사헌에 임명되는 데 김상헌이 반대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음으로 둘째 형 김상관(金尙寬)의 아들 김광찬(金光燦 1597∼1668)을 후사로 들인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1607년〔선조 40〕). 뒤에서 쓰겠지만 바로 이 김광찬의 후손에서 조선 후기의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계보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김상헌은 친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아픔은 후대의 커다란 영광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김상헌에게 광해군의 치세는 대체로 침체와 불행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의정부 사인ㆍ교리ㆍ사간ㆍ응교ㆍ직제학ㆍ동부승지 같은 비중있는 관직을 지냈지만 빛보다는 그늘이 더 짙었다.

첫 시련은 1611년(광해군 3)에 파직된 것이었다. 원인은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라고 불리는 우찬성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상소였다. 그 논지의 당부(當否: 옳고 그름)와 상관없이 그 글은 조선시대에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문건의 하나일 것이다. 제목 그대로 그 글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 이황을 변론해 배척하고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상헌은 동료들과 함께 정인홍을 강력히 비판했다.

“정인홍의 사람됨은 젊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편벽되고 막힌 것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이런 말을 했으니 어찌 노망이 들어 어두운 탓이 아니겠습니까. 정인홍은 자신이 스승으로 섬긴 사람과 존숭하는 사람을 추존해 후세에 드러나게 하려고 하면서 스승을 존숭하는 도리는 지나치게 아름다움만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도리어 후세의 비판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곧 복직되기는 했지만 김상헌은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에도 아들 김광찬이 역모로 몰려 옥사한 김제남(金悌男. 선조의 국구이자 영창대군의 외조)의 손녀사위라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

그 뒤에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었다. 1618년(광해군 10) 2월 생부 김극효가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에는 생모 정씨가(1621년〔광해군 13〕) 그 이듬해에는 모친 이씨가 별세했다(1622년). 그는 본관인 안동과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石室)을 오가며 삼년상을 치렀다.

1623년 3월에 광해군과 북인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인조와 서인이 집권하면서 김상헌은 서인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차례의 호란이 상징하듯이 인조의 치세에 국가와 국왕ㆍ신민은 모두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나이인 50세를 넘긴 김상헌은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행동으로 그 난관에 맞섰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김상헌은 석실의 움막에서 복상하고 있었다. 53세의 나이였다. 이듬해 4월에 탈상한 그는 1625년(인조 3)까지 이조ㆍ형조참의ㆍ대사간ㆍ우부승지ㆍ도승지ㆍ대사헌ㆍ부제학 같은 주요한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때 대륙에서는 명의 몰락과 청의 흥기라는 중국사의 마지막 왕조 교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1626년 8월에 김상헌은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파견되었다. 주요한 임무는 당시 가도(椵島)에 주둔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명나라의 무장 모문룡(毛文龍)과 관련된 사정을 명 조정에 해명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호란은 그가 북경에 도착한 직후에 발발했다. 1627년(인조 5) 3월에 북경에서 그 소식을 들은 김상헌은 명에 원병을 주청했지만 정묘호란은 개전 두 달 만에 종결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상헌은 형조ㆍ예조ㆍ공조판서ㆍ우참찬ㆍ대사헌 등 중직에 두루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석실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석실에 있었다. 66세의 노대신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함)한 조정을 뒤따라 들어갔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김상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데 반대했고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지은 항복 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인조의 물음에 “천도(天道)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청음집] <연보>).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주어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 거의 죽을 뻔한 것이다.

그달 그믐 인조는 성을 나왔고 항복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척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노대신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상헌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물론 반청(反淸)의 댓가였다. 1637년 2월 7일에 그는 안동으로 낙향했다. 형 김상용(金尙容)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3년 뒤인 1640년(인조 18) 11월에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그가 도성을 지날 때 인조는 어찰(御札: 임금의 편지)을 내려 위로했다.

경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나를 따라 함께한 지 역시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로는 군신 사이지만 정리로는 부자와 같다. 뜻밖에 화란이 터져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했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해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바란다.

김상헌은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를 만나고 온 신하들은 행동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김상헌은 1641년(인조 19) 심양의 북관(北館)에 구류되었다. 그해 11월 부인 이씨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도 병이 심해져 12월에 의주(義州)로 보내졌다가 1643년 1월에 다시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때 대표적 주화론자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와 있었다. 16세 차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이 포로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는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최명길은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라고 읊었고 김상헌은 그 운에 맞춰 이렇게 화답했다.

성패는 천운에 관계되어 있으니 成敗關天運
의(義)에 맞는가를 보아야 하리 須看義與歸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 雖然反夙暮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어서야 되겠는가 詎可倒裳衣
권도(權道)는 현인도 그르칠 수 있지만 權或賢猶誤
정도(正道)는 많은 사람들이 어기지 못하리 經應衆莫違
이치에 밝은 선비께 말하노니 寄言明理士
급한 때도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기를 造次愼衡機

김상헌을 비롯한 조선 지식인 대부분의 정신적 지주였던 명은 1644년(인조 22)에 멸망했다. 그때 김상헌은 74세였다. 그는 여러 시편에서 이에 대한 소회를 적었는데 그 중 한편은 다음과 같다.

지난 날 사신으로 입조해 빈객이 되니 奉節朝周昔作賓
바다 같은 황제 은혜 신하에게 미치었네 皇恩如海到陪臣
하늘과 땅이 뒤엎어진 오늘을 만나니 天翻地覆逢今日
아직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未死羞爲負義人

이듬해 2월에 김상헌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바로 석실로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두 달 뒤 급서했다.

이때부터 별세할 때까지 김상헌은 주로 석실에 머물렀다. 1646년(인조 24) 3월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해 한직인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이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함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중요한 말을 선정했다.

1649년 5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한번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고사했다. 그 대신 10월에 임금을 알현하면서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대사헌 김집(金集)을 중용할 것을 당부했다.

‘숭명배청’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대신의 일생은 3년 뒤인 1652년(효종 3) 6월 25일 82세로 마감되었다. 그는 석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주에 세워진 석실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과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에 모셔졌으며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37세 차이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송시열은 스승을 이렇게 기렸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으면 인류가 전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이 선생 같은 분을 내어 한 번 다스려질 조짐을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선생 같은 분을 내었는데 사람이 도리어 선생 같은 분을 숨겨 두려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앞서 말했듯이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압축하는 표현은 ‘삼수육창(三壽六昌)’이다. ‘삼수’는 양자인 김광찬의 세 아들 김수증(金壽增 1624∼1701. 공조참판)ㆍ김수흥(金壽興 1626∼1690. 영의정)ㆍ김수항(金壽恒 1629∼1689. 영의정)이고 ‘육창’은 김수항의 여섯 아들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영의정)ㆍ김창협(金昌協 1651∼1708. 대사간ㆍ대사성)ㆍ김창흡(金昌翕 1653∼1722)ㆍ김창업(金昌業 1658∼1721)ㆍ김창즙(金昌緝 1662∼1713)ㆍ김창립(金昌立 1666∼1683)이다. 그리고 이 계보는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김달행(金達行)-김이중(金履中)을 거쳐 김조순(金祖淳)에 이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계보의 영향력과 의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상헌의 생각과 행동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 당부를 논란하는 것은 이 짧은 글의 범위를 넘는 일이다. 끝으로 그가 지은 한 시조(“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등지고자 하랴마는 /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는 시대상황과 작자의 마음을 잘 담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과] 선조(宣祖) 29년(1596) 병신(丙申) 정시(庭試) 병과(丙科) 8위


청음집(淸陰集)

저자 : 문정공(상헌)파  상헌(尙憲)

생(生) : 1570.06.03

졸(卒) : 1652.06.25

좌의정(左議政) 증(贈)영의정(領議政) 

40권 14책. 목판본. 1671년(현종 12)경 저자가 직접 편정(編定)한 초고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1861년(철종 12) 그의 종10세손 세균(世均)에 의해 완판(?板)이 보판되었다.
1977년 그의 손자 수증(壽增)이 수집한 유집 3권에 후손 영한(寗漢)이 수집한 4권이 소실되자 14대손 창현(彰顯)이 유문을 모으고 부록을 붙여 모두 9권으로 만들어 『선원유고 仙源遺稿』와 합편 전서(全書)로 영인하였다.
권두에 저자의 자서(自敍)와 이강선(李康先)·장연등(張延登)의 조천록서(朝天錄序) 권말에 8대손 흥근(興根)의 발문이 있다. 유집의 6권말에는 송시열(宋時烈)의 발문이 있다.
권1∼8 시 915수 가곡(歌曲) 3수 권9에 조천록(朝天錄) 권10에 청평록(淸平錄) 권11에 설교집(雪?集) 권12에 설교후집(雪?集) 권13에 설교별집(雪?別集) 권14에 표전(表箋) 4편 교서(敎書) 6편 상량문 2편 책문(冊文) 1편 권15에 제문 17편 명(銘)·찬(贊)·송(頌) 5편 권16에 게첩(揭帖) 6편 국서(國書) 7편 권17∼22에 소차 138편 권23에 계사(啓辭)·의(議) 각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24∼30에 비명(碑銘) 47편 권31·32에 묘갈명 23편 권33∼35에 묘지명 28편 권36에 묘표음기(墓表陰記) 15편 권37에 행장 6편 권38에 기(記) 5편 서(序) 19편 권39에 제발(題跋) 17편 잡저 3편 권40에 서독(書牘) 45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영인본의 유집은 권1에 시 6수 시조 3수 권2·3에 남사록(南?錄) 권4에 설교집 권5에 문(文) 3편 권6에 남한기략(南漢紀略) 부록으로 반교문(頒敎文)·교서·사제문(賜祭文)·치제문(致祭文)·유사(遺事)·석실잡록(石室雜錄)·묘지명·묘정비(廟庭碑)·국조보감(國朝寶鑑)·실록(實錄)·가사(家史)·황명배신전(皇明陪臣傳)·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조천록」은 1627년(인조 5) 명나라에 정사로 다녀왔는데 이 때의 시문과 예부정문(禮部呈文)을 합해 사행시문(使行詩文)으로 편찬한 것으로 그 곳의 이강선과 장연등으로부터 서문을 받아 왔다.
「청평록」은 저자가 1635년 청평(淸平)을 유람하면서 출발할 때부터 당시 거처하던 석실(石室)에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일기체로 서술하고 명승고적에 대해 읊은 시편(詩篇)을 곁들인 문장이다.
「설교집」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배척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구금되었을 때 함께 구금된 조한영(曺漢英)과 수창한 시편을 모아 엮은 것으로 한(漢)나라 소무(蘇武)의 고사를 본떠 ‘설교집’이라고 한 것이다.그의 문장은 중후하면서도 이로(理路)가 정연하고 교식(巧飾)을 일삼는 일이 없으면서도 문사(文辭)가 뛰어나다.
소차(疏箚)의 문장은 순순설유(詢詢說諭)하는 의취가 드러나고 위국진충(爲國盡忠)의 지성이 문자 사이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1639년 12월에 바친 「청물조병심양소 請勿助兵瀋陽疏」는 친명(親明)과 배청(排淸)을 철저히 주장하는 의기와 간박(懇迫)한 충정이 표출되어 있다.의(議)는 주로 국상을 당했을 때 여러 의절(儀節)에 대해 헌의(獻議)한 것이 대부분이다. 원로 대신으로서 국정의 모든 분야에 깊이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100여 편에 달하는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제작했는데 이것을 통해서도 그가 병필가(秉筆家)였음을 알 수 있다.이 묘도문자 중에는 이항복(李恒福)·조헌(趙憲) 등의 신도비명을 비롯한 명인들의 일생을 다룬 글이 많이 들어 있다.
기의 「유서산기 遊西山記」는 「청평록」 이외의 유람기로 감회를 담은 훌륭한 문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독은 별로 많지 않으나 1623년에 쓴 「여북저김판서서 與北渚金判書書」에서는 당시 인조반정으로 인심의 향배가 변한 마당에 폐동궁(廢東宮)의 초상(初喪)을 근신해 봉행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폐비(廢妃)를 학대하지 말고 인왕동 신궁(神宮)에 있는 헌 옷 몇 벌과 궁비(宮婢) 몇 명을 보내 주어 생존하는 동안 어한시질(禦寒視疾)하고 죽거든 세목염관(洗沐斂棺)해 주라고 권하였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系子상헌(尙憲)
생부(生父)극효(克孝)
자(字)숙도(叔度)
호(號)청음(淸陰)
시호(諡號)문정(文正) 勤學好問曰 文 以正服之曰 正 배우기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
한다 하여 문이라 하고 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 하여 정이라 한다.
생(生)1570년 경오(庚午) 06월 03일
관직(官職)좌의정(左議政)
증(贈)영의정(領議政)
저서(著書)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鈔) 남사록(南槎錄) 청음집(淸陰集)
 선조경인년 진사(宣祖庚寅進士)에 급제하고 병신년 문과(宣祖丙申文科)에 급
 제하였다. 광해무신중시(光海戊申重試)에 입격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
 (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대제학(文衡)을 맡았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 인조병자년(仁祖丙子年)에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화의를 반대하고(斥和議) 통곡하며(哭裂) 국서(國書)를 찢었다
 . 심양 감옥(拘瀋獄)에서 六년간 갇혀있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終不屈
 ). 을유환국(乙酉還國)에 좌상(左相)이되었다. 壽八十三세 영상(領相)을
  증직 받았다. 효종세실묘정(孝宗世室廟庭) 배향(配享) 양주석실(楊州石室
 ) 송도숭양(松都崧陽) 정주(定州) 봉명(鳳鳴) 제주(濟州) 귤림(橘林)
  종성(鍾城) 종산(鍾山) 상주(尙州) 서산(西山) 정평(定平) 망덕서원
 (望德書院) 안동(安東) 서간(西磵) 광주(廣州) 현절(顯節) 의주(義州
 ) 기충(紀忠) 예안(禮安) 운계사(雲溪祠)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졸(卒)1652년 임진(壬辰) 06월 25일
묘(墓)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石室) 신천부군조(信川府君兆) 다음 1987
 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誌)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갈(碣)은 손자(孫子) 수
 증(壽增)이 썼다. 명(銘)은 자술(自述) 하였고 후서(後序)는 우암(尤
 菴)이 짓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계좌(癸坐)
배(配)정경부인(貞敬夫人)성주이씨(星州李氏)
생(生)1569년 기사(己巳) 월 일
졸(卒)1641년 신사(辛巳) 11월 27일
묘(墓)부군조(府君兆) 서쪽
간좌(艮坐)
묘표(墓表)가 있다
 부(父)음(蔭)선전관(宣傳官) 증(贈)판서(判書) 의로(義老)
 조(祖)별제(別提) 증(贈)참의(叅議) 형우(亨佑)
 증조(曾祖)주부(主簿) 증(贈)통례원(通禮院)좌통례(左通禮) 창(敞)
 외조(外祖)승지(承旨) 증(贈)위천군(威川君) 김백순(金伯醇) 본(本) 위성(威城)
12 세13 세14 세15 세16 세
번(璠)생해(生海)대효(大孝)상헌(尙憲)광찬(光燦)
원효(元孝)상준(尙寯)광욱(光煜)
광위(光煒)
광소(光炤)
광혼(光焜)
광련(光煉)
광희(光熺)
윤이지(尹履之)
김진휘(金晋輝)
극효(克孝)상용(尙容)광형(光炯)
광환(光煥)
광현(光炫)
광소(光熽)
남호학(南好學)
장유(張維)
이이성(李以省)
한인급(韓仁及)
이응인(李應寅)
이석망(李碩望)
성후용(成後龍)
상관(尙寬)광혁(光爀)
광찬(光燦)
광업(光㸁)
광적(光熵)
광요(光炓)
정홍택(鄭弘澤)
유시정(柳時定)
이시노(李時老)
이시양(李時陽)
상건(尙謇)
상헌(尙憲)
상복(尙宓)광식(光烒)
송치중(宋致中)
윤집(尹集)
이오(李悟)
선효(善孝)상안(尙安)광후(光厚)
후일(厚逸)
상빈(尙賓)광일(光逸)
고영찬(高永纘)
김의정(金義貞)
이천복(李千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