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김태규(金泰圭)


일명 김철(金鐵)로 자(字)는 덕여(德汝) 호(號)는 백초(白初)이다. 1891년 1월 20일 병일(炳逸)과 경주손씨 사이에서 4째 아들로 안동 길안 용계에서 태어났다.

송연식(宋淵植)의 기록과 신의주 형무소 옥고시 주고 받은 편지 12장과 딸 진향의 증언과 대종교 경문에 따르면 공은 칠척장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공의 부친이 애상(愛尙)히 여기어 길안 용계(龍溪) 대전리숙(大田里塾)에서수학(受學)케하니 일람(一覽)기득(旣得)하고 필법(筆法) 정묘(精妙)하여 그가 약관시(弱冠時) 해창(海窓)송기식(宋基植)에게 배(拜)하고 풍양서숙(風陽書塾)에서 신구학(新舊學)을 겸지(兼知) 하였으나 국가(國家)가 일제(日帝)에 넘겨졌으니 분개(憤慨)하여 책(冊)을 덮고 장탄(長歎) 음시(吟詩)하다가 삼천리 이천만민족은 그 누가 건지리오 하고 때로는 사격연습을 하였다.

공은 서간도에서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이 구국(救國) 제민(濟民)한다는 소리를 듣고 서신을 왕래하였다.해창(海窓)공이 깜짝놀라며 그대는 광복운동(光復運動)을 하는데 선봉장(先鋒將) 자격을 갖추었으니 석주(石州)의 지도를 받으라고 격려하였다.

공은 1912년 21세때 도만(渡滿)하여 이상룡(李相龍)을 비롯 여러 애국지사(愛國志士)와 사귀고 반석현(盤石縣)에 정착(定着)하고 1915년에는 가족을 만주로 오게 하였으나 대종교(大宗敎) 신자(信者)로써 동지 규합(糾合)에 주력하느라 가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기아에 허덕이다가 공의 배 의성김씨(義城金氏) 일길(日吉)은 태어난지 한달도 채 안되는신생아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은 신흥(新興) 무관학교(武官學校) 군사교련(軍事敎鍊)에 주력(注力)하다가 청산리 전투에서 백야(白冶)좌진(佐鎭) 장군을 도왔으나 본가에서는 1917년부터 1924년까지 6년간 공의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공이 33세때인 1924년에야 소식을 듣고 공의 배(配) 김일길(金日吉)은 아들 우진(宇鎭)과 딸 진향(鎭香)을 등에 업고 만주로 갔다.

서간도에서 생활하다 해룡현(海龍縣) 쓰바다에 1926년 신성학교(新成學校)를 설립하고 불우한 만주동포들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청소년의 학력을 향상시켰다.

공은 1929년 남일동(南逸東)(일명 남병구) 동지와 반석현에서 이상룡 총재르 만나고 돌아오다가 해룡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주고 받은 편지중에서 석강(石岡)김두한(金斗漢)과 주고 받은 편지에는
綠江深見底 -- 압록강물이 깊어도 바닥이 보이고
高浪直翻空 -- 높은파도가 바로 공중을 뒤친다
慣是湖邊女 -- 물가에 사는 여자도 습관에 젖어서
舟輕不畏風 -- 배는 가벼워도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시는 초지일관 백절불굴하면 곧 광복(光復)이 온다는 뜻이었다.공의 배(配)는 독립운동(獨立運動) 뒷바라지에 시달리어 1931년 사망하고 경영하던 신성학교도 일경의 감시로 폐교되었다.

공이 중국 각지를 누빌때 철(鐵)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또는 백초(白初)라 하였으며 군자금(軍資金) 모집과 독립군 모병 운동으로 송기식 연식 형제와 밀접한 연락을 가졌다.

1932년 저녁을 먹던중 남묵일세 하는 소리를 듣고 나간뒤 행방불명 되었으며 이날이 4월 14일 밤인데 일경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공의 딸 진향이 기억하고 있는 공이 후진들에게 가르쳐 주던 노래는
1절
이십육년 따뜻한 옛품을 떠나
세상풍진 모른느 나에 몸중에
난리중에 날이며 떠나가 보니
가는 나의 신세가 더욱 슬프다.
후렴
창파만경 청천은 앞을 가리어
창파만경 청천은 앞을 가리어
2절
백두금강 태백의 슬픔을 띠고
압록강 물결에 눈물을 뿌리고
사천여년 외로운 선조의 집을
부질없이 버리고 나 여기왔네
3절
상해천지 벌판에 적막한 곳에
한솟은 복락과 잠자리 밑에
우리부모 생각 몇번 났든가
남쪽으로 날아간 저 기러기여
나에 고향 소식을 전해 주셔요

태규(泰圭)공이실종되자 공의 아들 우진은 혼자 해룡현에 남아 부(父)의 소식을 수소문 하던중 一九三五년에 일경에 피살되었음을 확신하고 북산성자(北山城子) 정미소(精米所) 주인 박기성과 같이제사지내고 길안면 용계로 귀향하여 수명의 청년동지들과 함께 도만하여 일경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던중 급병을 얻어 七일만에 사망하니 모든계획이수포로 돌아갔다




안동김씨대종중
진사공(영균)파
태규(泰圭)
자(字)덕여(德汝)
호(號)백초(白初)
생(生)1891년 신묘(辛卯) 陰01월 20일
상훈(賞勳)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신으로 철(鐵)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국권이 피탈되자 1912년 중국 동삼성(東三省) 으로 건너가 대한협회(大
 韓協會) 회장이었던 이상룡(李相龍) 등과 교유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주력하였다 1917년부 터 1924년까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김좌진(金佐鎭)의 휘하에 들어가 청산리(靑山里
 )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10월 정의부 (正義府)를 조직할때 군
 사분과위원을 맡기도 했으나 탈퇴하였다 1926년에는 지린성(吉林省) 하이
 룽현(海龍縣) 쓰바다에 신성학교(學校)를 설립하여 교포들을 가르쳤다 이상
 룡의 지시로 상하이의 임시정부 요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
  4월 14일 하이룽현(海龍縣)의 자택에서 정체 모를 사람에게 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
졸(卒)1931년 신미(辛未) 陰04월 15일
묘(墓)만주 해룡현(海龍縣) 산성진(山城鎭)
배(配)의성(義城) 김일길(金日吉)
생(生)1891년 신묘(辛卯) 陰08월 15일
졸(卒)1930년 경오(庚午) 陰01월 05일
묘(墓)해룡현(海龍縣) 산성진(山城鎭)
 부(父)성락(聖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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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세23 세24 세25 세26 세
성순(性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