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판서(刑曹判書)  김석진(金奭鎭)


김석진(金奭鎭)은 문충공파 김낙균(金樂均)과 남원윤씨(南原尹氏) 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문정공파 도균(道均)의 자로 입양되었다.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종친부(宗親府) 벼슬을 거쳐 사과(司果)·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의 관직을 지내고 지평(持平)·장령(掌令)·사성(司成)·사간(司諫)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그 뒤 호조·형조·병조·이조의 참의에 이어 한성부의 좌·우윤과 호조·이조·형조·공조의 참판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광주부유수 및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896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비서원경(秘書院卿)·장례원경(掌禮院卿)·귀족원경(貴族院卿) 등을 거쳐 190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 해 1월 23일 오적신(五賊臣)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상소문에서 김석진은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 폐기가 가능하니 외부대신을 불러 여러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고 매국 역도들을 죽여서 국헌을 바로잡고 인민을 생지옥에서 구하라고 청하였다.

왕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고 날짜만 지연되자 다시 상주. 매국노들과 한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줄에 설 수 없으니 의효전향관(懿孝殿享官)의 직을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당시 향관의 줄에 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있었기 때문이다.조병세(趙秉世)가 조약에 반대 순사하자 조문길에 남대문 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산 김석진은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10년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던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김석진을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천실기(梧泉實紀)

저자 : 문정공(상헌)파  석진(奭鎭)

생(生) : 1843.01.21

졸(卒) : 1910.09.08

경신(庚申)문과(文科) 규장각(奎章閣)직제학(直提學) 숭록대부(崇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선후기 문신·의열사 김석진의 유고와 행장·묘지명 등을 수록하여 1961년에 간행한 실기.
1961년 김석진의 아들 김영한(金寗漢)이 편집·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김영한의 발문이 있다.
4권 1책. 신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두에 총목이 있고 각 권별로 목록이 있다. 권1에 시 18수 소차(疏箚) 36편 권2에 계사(啓辭) 13편 헌의(獻議) 1편 경연강의(經筵講義) 1편 전문(箋文) 3편 치사(致詞) 1편 서독(書牘) 3편 서(序) 2편 기(記) 1편 제문 1편 묘지 2편 묘표 1편 권3·4에 부록으로 순원숙황후어찰(純元肅皇后御札)·교지(敎旨)·교서·읍혈록(泣血錄)·유사·행장·묘지·묘갈명·고문(告文)·제문·애사·애장(哀章)·세계·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근정전진찬일갱진예제(勤政殿進饌日賡進睿製)」·「철인왕후만장(哲仁王后輓章)」·「신정왕후만장(神貞王后輓章)」·「순명비만장(純明妃輓章)」 등 왕실에 대한 하시(賀詩) 또는 만장이 거의 전부이다.소차 가운데 「옥당논사연명차(玉堂論事聯名箚)」는 1865년(고종 2) 옥당에 있을 때 죄인 상로(尙魯)·김진형(金鎭衡)·심이택(沈履澤) 등의 처벌을 연명으로 주청한 차자이다.
「옥당청복선연명차(玉堂請復膳聯名箚)」는 1890년 대왕대비가 죽어 임금이 예제(禮制)에 따라 감선(減膳)하고 있을 때 왕의 건강을 위해 복선을 주청한 차자이다.
「옥당청침수예산릉지명연명차(玉堂請寢隨詣山陵之命聯名箚)」는 왕이 영여(靈轝)를 따라 산릉에 가겠다는 것을 만류하는 내용의 차자이다.
「겸진소회재소(兼陳所懷再疏)」는 1896년 궁내부특진관을 사직하는 두 번째의 사직소로 임금의 일심을 바르게 하여 천리를 따르고 인욕을 제거하기를 아울러 청하는 내용이다.
계사 가운데 「빈청청복선연명계(賓廳請復膳聯名啓)」 역시 1890년 10차에 걸쳐 복선을 주청한 내용이다. 「경연강의」는 1864년에서 1866년 사이에 저자가 검토관 및 시독관으로 경연에 참석해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읍혈록」은 1910년 9월 4일부터 1911년 3월 5일까지의 기사로 저자가 일본 사람이 내린 관작과 금표를 거절하고 음독자결한 일의 전말을 아들인 김영한이 기록한 글이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系子석진(奭鎭)
생부(生父)낙균(樂均)
원파(元派)문충공(상용)파
자(字)경소(景召)
호(號)오천(梧泉)
생(生)1843년 계묘(癸卯) 01월 21일
관직(官職)경신(庚申)문과(文科)
규장각(奎章閣)직제학(直提學)
숭록대부(崇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상훈(賞勳)건국훈장 독립장
저서(著書)순의백정(殉義白靖) 오천실기(梧泉實記)
졸(卒)1910년 경술(庚戌) 09월 08일
배(配)정부인(貞夫人)해평윤씨(海平尹氏)
생(生)1844년 갑진(甲辰) 월 일
졸(卒)1925년 을축(乙丑) 09월 28일
묘(墓)파주시(坡州市) 법원읍(法院邑) 오현리(梧峴里) 선영(先塋)
 묘지(誌)는 아들 영한(寗漢)이 짓고 갈명(碣銘)은 해관(海觀) 윤용구(
 尹用求)가 지었다 .아들 영한(寗漢)이전(篆)하고 손자 윤동(潤東)이 썼
 다. 부인 묘지(夫人誌)는 아들 영한(寗漢)이 지었다
술좌(戌坐) 합폄(合窆)
 부(父)감역(監役) 치보(致輔)
 조(祖)성열(聲烈)
 증조(曾祖)지동(趾東)
 외조(外祖)진사(進士) 이종악(李鍾岳) 본(本) 완산(完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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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24 세25 세26 세27 세
연근(淵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