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는 1789년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과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1800년(정조 24)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다.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년(순조 2) 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삼간택 문제를 놓고 시·벽파(時僻派)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당시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김관주(金觀柱)와 권유(權裕)들의 방해 움직임이 있었다. 1809년(순조 9) 문조(文祖)를 낳았다. 문조는 1812년(순조 12)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문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830년(순조 30) 22세로 죽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하고 1834년(순조 34) 익종에 추존되었다.

순원왕후는 1827년(순조 27) 존호 명경(明敬)이 올려졌고 헌종 연간에 왕대비·대왕대비에 진호(進號)되었다. 그 뒤 문인(文仁)·광성(光聖)·융희(隆禧)·정렬(正烈)·선휘(宣徽)·영덕(英德) 등의 존호가 더해졌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원상(院相)에 권돈인(權敦仁)을 지명했다. 그리고 영조의 혈맥을 잇기 위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imagefont)의 셋째 아들을 지목해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수렴청정하였다. 1851년(철종 2)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해 그 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1857년(철종 8)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헌(慈獻)·현륜(顯倫)·홍화(洪化)·신운(神運) 등의 존호가 뒤에 추상되었다.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전한다.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의 세 공주가 있다.

시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순원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純元王后)이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의 1에 있다.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순원왕후는 그 뒤에도 20여 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 6) 12월).

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

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그녀는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逌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지금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기록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생(生)1789년 기유(己酉) 05월 15일
졸(卒)1857년 정사(丁巳) 08월 04일
묘(墓)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인릉
합폄(合窆)
부(夫)전주(全州) 순조(純祖)
@子효명세자(孝明世子)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女명온공주(明溫公主) 부
(夫)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女복온공주(福溫公主) 부(夫)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 @女덕온공주(德溫公主) 부(夫) 남녕위(
南寧尉) 윤의선(尹宜善) @系子철인장황제(哲仁章皇帝) 배(配) 철인장황후
(哲仁章皇后) 김씨(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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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행(達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