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복온공주(金福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州)는 1818년 11월 24일(순조 18년 음력 10월 26일)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차녀로 태어났다.
효명세자(孝明世子)와 명온공주(明溫公州)의 친동생이며 덕온공주(德溫公州)의 친언니이다.
1824년(순조 24) 9월 20일 복온(福溫)의 작호를 받고 정식으로 공주(公州)로 책봉되었으며 600결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효명세자는 삼매연림(三妹連林)이라는 글에서 복온공주(福溫公主)를 『복온이는 품성이 번화하고 기골이 풍영하여 수중의 연꽃 같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풍영(豊盈)하다는 말은 『풍만하고 기름지다』는 의미인데 아마 복온공주의 모습은 젖살이 통통한 아가씨였을 것이다.
복온공주(福溫公主)도 시문(詩文)을 짓고 글씨를 쓰는 문예 활동을 하였다.

물고기가 물에 뜬 연꽃을 희롱하네
봄날에 따사로운 바람 천천히 불어
낙유원에서 빼어난 잔치 열었구나
물고기가 부용꽃 핀 물속에서 희롱하니
못가의 누각에 연꽃 향기 멀리 풍기노라

이 시에는 순조(純祖)가 차상일(次上一)이라고 점수를 매기고 백면지 2권 붓 5자루 먹 3개를 하사한다는 기록이 같이 있다.
복온공주(福溫公主)가 창덕궁의 옥화당에서 지낼 때 짓고 쓴 시로 한글 시 7편과 시 3편이 남아 있고 모두 12세 때 쓴 것이다.
시마다 맨 앞에 시제를 썼으며 순조가 직접 매긴 점수와 점수에 따라 내린 상품 목록이 적혀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복온공주의 유일한 글씨인 동시에 조선의 왕이 자신의 딸에게 직접 작문을 가르쳤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1830년(순조 30) 순조(純祖)의 대리청정기에 부마(駙馬) 간택이 이루어졌다.
2월 22일 초간택 3월 10일 재간택 3월 28일 삼간택을 행하였고 세 번에 걸친 간택은 모두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렸다.
3간택 끝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김학순(金學淳)의 손자 김병주(金炳疇)가 낙점되어 창녕위(昌寧尉)라는 작호(爵號)를 받았다.
복온 공주(福溫公主)의 가례(嘉禮) 때에 전안(奠鴈)할 처소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정의(鄭漪)의 집으로 하고 동뢰연(同牢宴)은
공주궁(公主宮)에서 마련했다.
혼례때 입었던 활옷과 방석이 현재 남아 있다.

복온공주(福溫公主)는 시집간지 2년만인 1832년 5월 10일 갑자기 졸서한다.
복온 공주(福溫公主)가 졸서(卒逝)하였다. 하교하기를
『복온 공주의 상(喪)에 동원 부판(東園副板) 1부(一部)를 실어 보내도록 하라. 거애(擧哀)는 대내(大內)에서 하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복온 공주의 상에 방금 거애하고 나니 슬프고 서러워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도 필단(匹緞)·미포(米布) 등의
물건을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예대로 실어 보내고 온갖 상수(喪需)는 각사(各司)의 관원이 직접 올려 미진한 일이 없도록 하며
성빈(成殯)하는 곳은 본방(本房)에서 하되 문로(門路)는 단봉문(丹鳳門)으로 하라』
하였으며 또 하교하기를
『성복일(成服日)에는 친히 공주의 집[主第]에 나갈 것이니 예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복온공주는 소생이 없었으므로 문충공(文忠公派)의 김병교(金炳敎)의 아들 김덕균(金德均)을 계후(系后)로 삼아 장례를 치렀고
김덕균이 또 후사가 없어서 김낙균(金樂均)의 아들 김석진(金奭鎭)을 계후(系后)로 삼았으며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이
한일합방을 반대하며 자결하자 휴암공파의 김홍진(金鴻鎭)의 아들인 김녕한(金寗漢)을 계후(系后)로 삼았다.
김녕한의 아들인 김윤동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문현 충현(일중) 창현 응현(여초) 정현으로 대단한 서예가들이다.

복온공주의 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에 마련되었으며 훗날 남편 김병주와 합장되었다.
한편 당시 이 인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 지역의 이름을 공주의 무덤에서 유래하여 공주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번동에는 복온공주와 김병주의 재사인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가 있으며
이 재사는 2002년 9월 13일 서울특별시의 등록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복온공주의 묘는 파주시(坡州市) 법원읍(法院邑) 오현리(梧峴里)에 있었으나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을리 산 99-1에 있다.

복온공주가 시집올때 가져온 궁중술인 삼해주의 비법은 녕한의 셋째아들 춘동의 둘째 아들 동현(同顯)의 배(配)인 권희자 장인이 전수자로 계승되어오고 있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복온공주(福溫公主)
생(生)1810년 무인(戊寅) 陰10월 13일
 7살 때인 1824년 11월 10일(순조 24년 음력 9월 20일) 정식
 으로 공주에 책봉되어 복온공주(福溫公主)라고 하였다. 이후 13살 때인
 1830년 4월 20일(순조 30년 음력 3월 28일) 삼간택을 거쳐 부
 사과를 지낸 안동 김씨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와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며 김병
 주는 창녕위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 해 5월 20일(음력 4월 28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혼인 2년만인 1832년 6월
 10일(순조 32년 음력 5월 12일) 1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순조는 현종의 딸 명안공주의 예에 맞춰 장례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조정의 관원들에게 장례에 미진한 부분이 없도록 할것을 명하였다. 또 성복
 을 하는 날에는 순조가 직접 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일찍 사망하여 소생
 은 없었다 복온공주의 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에 마련되었
 으며 훗날 남편 김병주와 합장되었다. 한편 당시 이 인근 지역에 살던 사
 람들은 이 지역의 이름을 공주의 무덤에서 유래하여 "공주릉"이라고 불렀다
 고 한다. 현재 번동에는 복온공주와 김병주의 재사인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
 사가 있으며 이 재사는 2002년 9월 13일 서울특별시의 등록문화재 제
 4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복온공주가 사망하고 불과 한달 후인 183
 2년 7월 10일(순조 32년 음력 6월 13일) 공주의 친언니인 명온공
 주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순조의 자녀는 셋째 딸인 덕온공주를
 제외하고 모두 부왕보다 일찍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순조보다 오
 래 산 덕온공주도 1844년(헌종 10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편 복온공주의 남편 김병주는 1853년 3월 28일(철종 4년 음
 력 2월 19일) 사망하였다
졸(卒)1832년 임진(壬辰) 陰0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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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22 세23 세24 세25 세
이중(履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