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寧嬪)


영빈(寧嬪)은 성천부사(成川副使) 등을 지낸 김창국(金昌國)과 돈녕부지사(敦寧府知事) 등을 지낸 이정영(李正英)의 딸인 완산이씨(完山李氏) 사이에서 1669년에 태어났다.

조부는 공조참판 등을 지낸 김수증(金壽增 1624〜1701)으로 그의 형제들인 김수흥(金壽興 1626〜1690)과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은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곧 영빈 김씨는 서인(西人) 노론(老論)의 영수였던 김수항의 종손녀로 당시 최고의 권세가 출신이었다.

1686년(숙종 12) 음력 3월 28일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추천으로 숙의(淑儀)로 간택되었으며 음력 4월 26일에 입궐하였다. 그리고 명문가 출신이었던 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 그해 음력 5월 27일에 소의(昭儀)가 되고 음력 11월 5일에 귀인(貴人)이 되었다.

영빈 김씨는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던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견제하기 위해서 간택후궁으로 입궁했지만 숙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결국 1689년(숙종 15) 희빈 장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후의 경종)에게 원자(元子)의 명호(名號)를 내리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몰락한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인현왕후와 함께 폐출(廢黜)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영빈 김씨는 음력 4월 22일에 김수항 홍치상(洪致祥) 등과 공모하여 왕의 기밀을 염탐하고 유언비어를 지어내 유포한다는 죄로 작호(爵號)가 삭탈되어 폐출되었다. 10일 뒤인 음력 5월 2일에는 인현왕후 민씨도 폐출되었다. 그리고 영빈 김씨의 종조부과 이모부인 김수항과 홍치상은 사사되었고 조부와 종조부인 김수증과 김수흥은 유배되었다.

하지만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그해 음력 4월 12일 영빈 김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다시 작호(爵號)를 회복하였다. 다시 귀인(貴人)으로 복위된 영빈 김씨는 인현왕후가 죽고 1702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숙종의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자 그해 음력 10월 18일에 영빈(寧嬪)으로 진봉하였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이 즉위한 뒤에는 관례에 따라 궐 밖으로 나와 거주하였는데 그해에 경종은 영빈의 저택을 개조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빈 김씨는 경종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경종 중독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론(少論)의 탄핵을 받았으며 1721년과 1722년의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에는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나 인원왕후의 비호로 무마되었다. 그리고 1724년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노론과 가까웠던 영조(英祖 1724~1776)가 즉위한 뒤에는 각별한 예우를 받았다.

영빈 김씨는 1735년(영조 11) 음력 1월 12일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조는 자신이 어렸을 때 영빈 김씨를 늘 어머니라고 불렀다며 성대히 장례를 치르도록 특별히 명했으며 자신의 서녀(庶女)인 화유옹주(和柔翁主)를 봉사손(奉祀孫)으로 삼았다. 영빈 김씨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에 있으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영빈(寧嬪)
생(生)1669년 기유(己酉) 월 일
 숙종 후궁
졸(卒)1735년 을묘(乙卯) 陰01월 12일
묘(墓)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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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17 세18 세19 세20 세
광찬(光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