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참판(工曹叅判)  김수증(金壽增)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 뒤 형조정랑 공조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 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1682년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頤)와 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 「하도낙서(河圖洛書)」 「선후천팔괘도(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 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과 1692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에 그와 후손들이 창작한 「谷雲九曲歌」를 곁들여 만든 『곡운구곡도첩』이 있다.상훈과 추모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德沼里) 에 묘가 있다. 묘비는 1710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김창흡(金昌翕)이 썼다.

효종(孝宗) 1년(165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2위



곡운집(谷雲集)

저자 : 문정공(상헌)파  수증(壽增)

생(生) : 1624.04.14

졸(卒) : 1701.03.04

경인(庚寅)생원(生員) 공조(工曹)참판(叅判) 

조선후기 문신·학자 김수증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11년에 간행한 시문집.
1711년(숙종 37) 김수증의 조카 김창흡(金昌翕)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창흡의 서문이 있다.
6권 3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2에 시 547수 권3·4에 가기(家記) 12편 기 19편 권5에 서(書) 43편 제문 5편 권6에 장지(狀誌) 4편 잡문 14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1675년(숙종 1) 송시열(宋時烈)과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유배되자 성천부사를 사직하고 강원도 화천의 곡운(谷雲)으로 퇴거하여 산천을 벗하면서 주위의 자연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다. 주로 연작(連作)이 많은데 「성도술회(成都述懷)」·「자영희부(自瀛戱賦)」·「윤삼월초파일환화음(閏三月初八日還華陰)」·「시월망일우이율북(十月望日又移栗北)」 등의 연작시가 10편이나 된다.
시의 흐름이 고아하고 산수를 묘사한 것은 그 진경을 보는 듯한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기는 대부분 산천을 유람한 기행문이며 그 가운데 「풍악일기(楓嶽日記)」는 1680년 가을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고 그 아름다운 절경과 고적 등을 소개한 일기체의 기행문이다.
「곡운기(谷雲記)」·「화음동지(華陰洞志)」·「유지당기(有知堂記)」·「무명와기사(無名窩記事)」·「송풍정기(松風亭記)」 등은 곡운에 대한 기록인데 그가 곡운을 화악산(華嶽山) 북쪽에 있다고 하여 화음동(華陰洞)이라 이름 짓고 그 자연경관을 즐기며 계곡의 ‘곡운구곡(谷雲九曲)’과 바위에 이름을 붙이고 정자와 누대를 세운 경위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화음동은 송시열이 만년에 강학하던 충청북도 괴산의 화양동(華陽洞)과 대조가 되는 명칭으로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의 배청척화론(排淸斥和論)과 송시열의 북벌론(北伐論) 내지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이념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양구곡’과 상응하여 ‘곡운’ 및 ‘화음구곡’이 설정된 것이라 볼 수 있고 그 사상의 연원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高山九曲)」과 주희(朱熹)의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임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지당(有知堂)을 세워 제갈량(諸葛亮)의 화상과 김시습(金時習)의 친필 족자를 모셨다는 기록은 그가 대의와 충절을 높이는 의리정신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거하던 부지암(不知庵) 앞 시냇가의 바위를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인문석(人文石)으로 명명하여 음양과 천인(天人)으로 상대를 이루게 했으며 인문석 위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제2도 음정양동도(陰靜陽動圖)와 하도낙서(河圖洛書)와 복희팔괘·문왕팔괘의 3단계를 새겨 넣었다.
그는 주희의 합조산고사(閤皁山古事)를 본받아 역도(易圖)를 새긴 것이라 밝히고 있는데 그의 사상 속에 『주역』의 비중이 크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서(書)는 박세채(朴世采)·권상하(權尙夏) 등 18인과 주고받은 서한이다. 잡문 가운데 「김승경사실(金勝京事實)」은 김승경이 병자호란 때 난을 피해 오신산(五申山)으로 들어갔다가 붙들려 여진·몽고 등에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그곳의 풍속·지리·목축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일본과 청나라의 상태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978년 김충현(金忠顯)이 영인·간행한 『곡운집』에는 권두에 김창현(金彰顯)이 쓴 해제(解題)를 비롯하여 저자의 유묵(遺墨)·인기(印記) 조세걸(曺世杰)이 그린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가 있으며 부록으로 가사(家史)·묘표와 「곡운제영(谷雲題詠)」이라는 제목 아래 송시열의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농수정기(籠水亭記)」 등 9편이 있어 송시열의 그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송시열이 쓴 「서김연지와유록후(書金延之臥遊錄後)」와 작자 미상의 「금석총발(金石叢跋)」을 통해 김수증이 편찬한 문헌으로 시문집인 『와유록』과 금석문을 모은 『금석총』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금석문과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수증(壽增)
자(字)연지(延之)
호(號)곡운(谷雲)
생(生)1624년 갑자(甲子) 04월 14일
관직(官職)경인(庚寅)생원(生員)
공조(工曹)참판(叅判)
저서(著書)곡운집(谷雲集)
 춘천(春川) 춘수영당(春睡影堂)에 배향(配享)
졸(卒)1701년 신사(辛巳) 03월 04일
배(配)정부인(貞夫人)창녕조씨(昌寧曺氏)
생(生)1627년 정묘(丁卯) 월 일
졸(卒)1671년 신해(辛亥) 02월 13일
묘(墓)남양주시(南楊州市) 와부읍(瓦阜邑) 덕소리(德沼里) 석실(石室) 선조내(
 先兆內)
 묘표(表)는 작은 아들 삼연(三淵) 창흡(昌翕)이 짓고 기문(記)은 문형
 (文衡)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가 썼다
경좌(庚坐) 합폄(合窆)
 부(父)문충공(文忠公) 한영(漢英)
 조(祖)참판(叅判) 문수(文秀)
 증조(曾祖)주부(主簿) 경인(景仁)
 외조(外祖)참의(叅議) 이지선(李祗先) 본(本) 성주(星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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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15 세16 세17 세18 세
대효(大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