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내(金琜)의 딸이다.

1645년(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하고 1646년 진사시와 1651년(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典籍)이 되었다. 이어 병조좌랑·사서(司書)·경기도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165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이 해 정시 문과에 5등으로 급제해 효종으로부터 말을 받았으며 이듬해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어 중학(中學)·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1655년 호당(湖堂)에 사가독서하고 수찬이 되었다가 응교(應敎)·사간·보덕(輔德)을 지냈으며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 형조참의(刑曹叅議)·승지(承旨)·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릉비의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도승지·예조참판·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662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오른뒤 왕의 특명으로 예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특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명사들을 조정에 선임하는 데 힘썼다.1672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에 승진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그러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이 왕의 경원을 받고 물러남을 보고 남인 재상 허적(許積)을 탄핵한 대간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판중추부사로 물러났으며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김수흥(金壽興)이 쫓겨나자 대신 좌의정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숙종 즉위 후 허적·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고 1678년(숙종 4) 철원으로 이배되었다.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복귀 영의정이 되어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였다.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임되었다.1689년 태조 어용(太祖御容)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掌令) 김방걸(金邦杰) 등이 탄핵해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뒤이어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한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 인의 공격과 사헌부·사간원의 합계(合啓)로 사사되었다. 이는 경신 이후의 남인 옥사를 다스릴 때 위관으로 있었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재상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했기 때문에 입게 된 보복이었다.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을 일삼아 흉당(凶黨)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尹拯)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측에서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과]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1[壯元]위


문곡집(文谷集)

저자 : 문정공(상헌)파  수항(壽恒)

생(生) : 1629..

졸(卒) : 1689..

병술(丙戌)진사(進士) 신묘(辛卯)문과(文科) 대제학(大提學) 영의정(領議政) 

조선후기 문인 김수항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9년에 간행한 시문집.
『문곡집(文谷集)』은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金昌集)과 김창협(金昌協)이 김수항의 시문 중 상당 부분을 제외한 채 28권으로 편집한 후 김창집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재직할 당시 비용을 마련하여 1699년(숙종 25)에 간행한 초간본이다.
이후 1702년(숙종 28) 송준길(宋浚吉)의 문인 안세징(安世徵)이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재직하며 초간본을 저본으로 일부분 수정하여 중간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초간본은 운각활자(芸閣活字)로 간행한 28권 13책이고 중간본은 목판본인데 역시 28권 13책이다. 앞부분에는 전체의 목차인 총목(總目)과 각 권별 목록이 끝부분에는 1699년 김창협이 지은 발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제1권부터 제7권까지는 1 030수의 시가 수록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지어진 시대순으로 수록되었다. 곳곳에 저자가 기록한 주석과 편찬자의 주석이 자세하게 실려 있으며 제7권에는 도잠(陶潛)의 시에 대한 차운시 50수와 과체시(科體詩) 2수가 별도로 수록되었다.
제8권부터 제15권까지는 상소문과 차자(箚子)로 구성되었는데 1653년(인조 4)에 사간원 정언(正言)의 사직을 청하며 올린 「사정언소(辭正言疏)」부터 1688년(숙종 14)에 올린 「도교외진정소(到郊外陳情疏)」까지 190여 편이 작성된 시기순으로 수록되었다.
사직 상소문이 가장 많지만 갑인예송(甲寅禮訟) 경신환국(庚申換局) 등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한 상소문들이 특히 주목된다.제16권에는 「대사간시이정지문청죄승엄지피혐계(大司諫時以鄭之問請罪承嚴旨避嫌啓)」 등 계문(啓文) 9편이 수록되었다.
제17권에는 「중종폐비신씨신주처치의(中宗廢妃愼氏神主處置議)」 등 의문(議文) 55편이 수록되었는데 현종(顯宗) 승하 후 상례(喪禮) 문제 인경왕후(仁敬王后) 상례의 복제(服制) 등 예제(禮制)와 관련한 내용이 다수를 차지한다.
제18권부터 제20권까지는 묘도문자(墓道文字)가 수록되었는데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의 신도비명 송시묵(宋時默)·임형수(林亨秀) 등의 묘갈명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영릉지(寧陵誌) 이단상(李端相)·나만갑(羅萬甲) 등의 묘지(墓誌) 홍서봉(洪瑞鳳)·김인후(金麟厚) 등의 묘표(墓表)가 수록되었다.
제21권부터 제22권까지는 정철(鄭澈) 등의 행장 9편 먼저 죽은 딸 등의 행적(行蹟) 2편이 수록되었다.
제23권부터 24권까지는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제문 32편과 애사(哀辭) 1편이 수록되었다.
제25권에는 왕세자 책봉 후의 반교문(頒敎文) 중궁(中宮)의 책문(冊文) 왕세자빈 교명문(敎命文) 영녕전(永寧殿)을 고친 후의 상량문 등이 수록되었다.
제26권에는 김장생의 문집에 대한 「사계선생문집서(沙溪先生文集序)」 등 서문 5편 영암(靈巖)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지은 「풍옥정기(風玉亭記)」 등 기문 8편 임형수의 문집에 대한 「금호집발(錦湖集跋)」 등 발문 12편 16세에 지은 「화왕전(花王傳)」 등 잡저 9편이 수록되었다.
제27권부터 제28권까지는 편지가 수록되었는데 송시열 등 주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제작 시기순으로 수록되었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수항(壽恒)
자(字)구지(久之)
호(號)문곡(文谷)
시호(諡號)문충(文忠)으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 함을(勤學好問) 문
(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정하고 바름을(兼方公正) 충(忠)이라
한다
생(生)1629년 기사(己巳) 월 일
관직(官職)병술(丙戌)진사(進士)
신묘(辛卯)문과(文科)
대제학(大提學)
영의정(領議政)
저서(著書)문곡집(文谷集)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공부하였다.일찍이(嘗嚴斥) 윤
 휴(尹鐫)등이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자(悖理積변) 흉당(凶黨)을 매우 엄
 하게 다스렸다. 一六八九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전남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갑술년(甲
 戌) 복관(復官) 되었다 .시문과 글재주에 능했으며 반시 진사시 알성문과
  춘당대문과 중시 등 五번 과거에 급제하였다.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
 書院) 진도(珍島)의 옥병서원(玉屛書院)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에 배향(配享) 되었다
졸(卒)1689년 기사(己巳) 월 일
배(配)정경부인(貞敬夫人)안정나씨(安定羅氏)
생(生)1630년 경오(庚午) 월 일
졸(卒)1703년 계미(癸未) 06월 22일
묘(墓)남양주시(南楊州市) 이패동(二牌洞) 산十一
 묘지(誌)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묘갈(碣) 지문(誌文)을
  사용하여 곡운공(谷雲公)이 예서(隸書)로 쓰고 묘표(表) 는 아들 창흡
 (昌翕)이 지었다
합폄(合窆)
 부(父)목사(牧使) 성두(星斗)
 조(祖)참의(叅議) 만갑(萬甲)
 증조(曾祖)보덕(輔德) 급(級)
 외조(外祖)판서(判書) 김남중(金南重) 본(本) 경주(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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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15 세16 세17 세18 세
대효(大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