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大司憲)  김이성(金履成) |
1739년(영조 15)~미상. 조선 후기 문신. 증조부는 김성도(金盛道)이고 조부는 김시간(金時侃)이며 부친은 김의행(金毅行)이다. 1773년(영조 49) 증광시 병과 45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삼남암행어사(三南暗行御史)‧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776년(영조 52)에 도당(都堂)에서 이루어진 한림권점(翰林圈點)과 1787년(정조 11년) 도당록(都堂錄)에 선발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사당인 문희묘(文禧廟)의 영건청(營建廳) 낭청(郞廳) 공사의 실무를 담당하여 가자 되었다가 조정의 체통을 훼손하였다는 좌의정(左議政) 이성원(李性源)의 상차(上箚)에 의해 파직되었다. 이후 복관되어 승지‧예조참의‧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을 역임하다가 1792년(정조 16)에 충청도 품관(品官) 홍입인(洪立人)이 결성인(結城人) 한현세(韓顯世)를 모함한 것을 우의정(右議政) 김이소(金履素)에게 그대로 보고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인천부로 귀양을 갔다. 1793년(정조 17)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복직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다. 1794년(정조 18) 사직을 청하는 상소 가운데 불경스러운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영동현(永同縣)으로 좌천되었다가 1795년(정조 19)에 사간원대사간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