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판서(禮曹判書)  김응균(金應均)


부(父) 김병성(金炳星)과 모(母)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1801년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시만(時萬)이고 시호(諡號)는 효헌(孝憲)이다.

1834년 문과(文科)에 급제한후 기사관(記事官) 주서(注書) 병조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을 거치고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나갔다.

1840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돌아온뒤 다시 지평(持平)이되고 1841년 정언(正言) 부교리(副校理) 1842년 교리(校理) 경상좌도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수찬(修撰)을 지냈다.

1843년 장악원정(掌樂院正) 응교(應敎) 1844년 장령(掌令) 집의(執義) 1845년 사복시정(司僕寺正) 1846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예조참의(禮曹叅議)를 지낸뒤 북청부사(北靑府使)로 나갔다.

1848년에 우부승지( 右副承旨)로 다시 돌아왔으나 1849년 철종 즉위년에 전라도 임실로 유배를 갔다.1850년 유배에서 풀려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복귀하고 1851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

1853년 안동부사(安東府使)로 갔다가 다음해 우승지(右承旨)로 중앙에 돌아왔다.
1855년 이조참의(吏曹叅議)에 제수되고 1857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갔다가 1858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다시 돌아왔다.

1859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가자되고 1860년 이조참판(吏曹叅判)이 되었다.
1862년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로 나갔다가 1862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1864년 고종1년에 우참찬(右參贊) 1865년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사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겸 의정부참정(議政府叅政)겸 홍문관대학사(弘文館大學士)로 추증되었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응균(應均)
자(字)시만(時萬)
시호(諡號)효헌(孝憲)으로 은혜를 어버이에게 돌려드림을 효라 하고(甚惠受親) 착함을
행하여 배리가 될만 함을 헌(憲) 이라한다(行善可紀)
생(生)1801년 신유(辛酉) 01월 06일
관직(官職)갑오(甲午)문과(文科)
예조(禮曹)판서(判書)
졸(卒)1875년 을해(乙亥) 04월 28일
묘(墓)서어리(鋤漁里) 선조(先兆) 아래 오른쪽 기슭
임좌(壬坐)
배(配)정부인(貞夫人)달성서씨(達城徐氏)
생(生)1801년 신유(辛酉) 월 일
 부(父)현감(縣監) 유호(有皓)
 조(祖)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양수(亮修)
 증조(曾祖)명재(命載)
 외조(外祖)이집성(李集成) 본(本) 연안(延安)
배(配)함안박씨(扶安林氏)
생(生)1809년 기사(己巳) 04월 13일
졸(卒)1853년 계축(癸丑) 07월 06일
 부(父)재주(載周)
 함안박씨는 안동부 서부 안막리(安幕里) 출신으로 김가진이 태어났을 때에도
  그곳에 친정 식구들이 살고 있었다.박씨의 묘소는 그곳의 유명사찰인 봉정
 사 뒤쪽의 사찰 관할 부지에 정해졌다. 이 과정에서 7세인 어린 김가진이
  사찰 측의 결정에 힘을 실었다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묘소를 쓸 땅은,
 화심혈(花心穴)의 명당이었다 한다. 화심은 꽃의 가운데 있는 꽃술로 후손
 (後孫)이 꽃이 피어나듯 발흥한다는 길지(吉地)였다. 김가진이 이 명당을
  어머니 묘소로 쓸 것을 고집하여, 식음(食飮)을 마다 하니 절에서 어쩔
  수 없이 묘터를 허락해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Warning: mysql_fetch_array(): supplied argument is not a valid MySQL result resource in /home/andong/www/vksrhks/php/person.php on line 562
22 세23 세24 세25 세26 세
도순(道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