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부사(水原府使)  김수인(金壽仁)


자는 원보(元甫).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다.

1634년(인조 12) 음보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어 옥책문(玉冊文)을 만드는 데 감독하였고 이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사복시부정(司僕寺主簿) 등을 지냈다.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상원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토산싸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부상당하였다.

그 뒤 증산·의흥·창녕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다.효종이 그 무재와 방략(方略)을 알고 특별히 양주목사로 임명하고 얼마 뒤 수원부사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게 하고 갑옷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병자호란 때의 부상으로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버리고 보령의 모도(茅島)에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부모의 봉양을 위해 익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죽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엄하여 어른스러운 기량이 있었으며 조용히 방안에서 학문을 즐겼다. 서예에도 뛰어나 전서·예서 등을 잘 썼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수인(壽仁)
자(字)원보(元甫)
생(生)1608년 무신(戊申) 07월 13일
관직(官職)수원(水原)부사(府使)
증(贈)이조(吏曹)참의(叅議)
 상원(祥原) 치소에서 청인(淸人)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였다는 소
 식을 듣고 원수진(元帥陣)에 참가하였으나 김자점(金自點)이 군영만 지킬뿐
  군부(君父)를 구원할 뜻이없었다. 급히 분격하여 혼자진격하였으나 적의
 숫자가 많아 대적할 수 없자 기묘한 계책을 써서 적을 격파하여 적의 예봉
 (銳鋒)을 차단할 수 있었다. 효종이 설분할 뜻을 가지고 수원방어사(水原
 防禦使)로 탁용하였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졸(卒)1660년 경자(庚子) 06월 19일
배(配)숙부인(淑夫人)창녕성씨(昌寧成氏)
생(生)1607년 정미(丁未) 월 일
졸(卒)1655년 을미(乙未) 03월 28일
묘(墓)홍성 서부(西部) 이수동(梨樹洞) 배위는 같은산 다른 기슭에 있다
 묘지(墓誌)는 손자 시보(時保)가 지었고 묘갈(墓碣)은 우상(右相) 이의
 현(李宜顯)이 지었으며 부제학(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이 쓰고 양쪽 기슭
 에 각각 묘표가 있다 손자 시보(時保)가 음기(陰記)를 지었다
자좌(子坐)
 부(父)현감(縣監) 홍헌(弘憲)
 조(祖)정언(正言) 자제(子濟)
 외조(外祖)별좌(別坐) 허사맹(許思孟) 본(本) 양천(陽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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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효(克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