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수(高城郡守)  김성달(金盛達)


김성달(金盛達)은 김수민과 남원윤씨 사이에서 1642년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靑洲 자는 伯兼이며 한성 판관 고성 군수(高城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절의지사 선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선생의 증손으로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의 종증손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 문충공 월사 이정구(文忠公 月沙 李廷龜 1564~1635)의 증손녀로 여류시인인 이옥재(李玉齋 1643-1690)이다. 김성달 부부는 선대로부터 맺어온 학맥 인연에 충절과 문장이라는 두 축을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선조의 철학과 삶이 가문의 인연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가정생활에 녹아져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찍이 이 부부의 딸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가 “비록 여자의 몸이라도 부모님이 낳아 길러주신 은혜를 입어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어찌 용렬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은 것을 다툴 수 있겠는가?”(<자경편> ‘자수장’,“雖是女子之身 蒙父母生成之恩 而生長於名門 寧可碌碌 與禽獸之徒 爭長競短乎”) 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에서도 김성달 가의 넘치는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용(金尙容)은 국문시가 <오륜가> 5장과 <훈계자손가> 9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이 집안의 국문시가에 대한 애정과 창작 활동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내려 하나의 문학 전통을 형성하였다. 김성달(金盛達)도 갈산 오두리에 있을 때는 가사 작품 <오산곡(鰲山曲)>을 강원도 고성군수 재직 시에는 <봉래곡(蓬萊曲)>을 지었다(안타깝게도 이 두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성달(金盛達)의 큰 아들 김시택(金時澤 1660~1713)도 자형나무를 매개로 노래한 시조 한 수가 전해진다. 이 시조는 형제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형제 9남매의 삶과 죽음 이별의 아픔을 함축한 시이다. 이 후 자형나무 시는 형제간에 절구 형태의 화답 한시로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 부부의 막내 딸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 역시 여류시인이다.

이옥재(李玉齋 1643-1690)는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은 것을 알았던 조선의 여성지식인이다. 이는 남편 김성달(金盛達 1642-1696 자 伯兼 호 靑洲)이 평가한 아내 이옥재의 모습이다.(안동세고-209 <次人韻悼亡>. ‘多聞多見復多知’) 이옥재는 월사 이정구(1564-1635)가 증조 현주 이소한(1598-1645)이 할아버지 동곽 이홍상(1619~1645)이 아버지인데 이홍상의 1남 2녀 가운데 첫째 딸로 태어났다. 월당 강석기(1580-1643)는 외조이다. 이옥재의 증조 월사 이정구는 조선 중기 문장사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정구의 장자 이명한(1595~1645)의 네 아들 일상ㆍ가상ㆍ만상ㆍ단상과 차자 이소한의 네 아들 은상ㆍ홍상ㆍ유상ㆍ익상 여덟 형제가 수창한 시편은 ‘연주집(聯珠集)’이라는 시집으로 간행되었는데 세상에 크게 유행하기도하였다.

이옥재는 이러한 친정의 문학적 환경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문인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타고났다. 거기에 남편 김성달 역시 혹독하리만치 시 짓기를 좋아하였던 문학애호가였다. 이옥재 부부는 홍성 갈산 오두리에 살면서 ‘갈뫼김씨(옷머리김씨)’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 이옥재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가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들 아홉 자녀의 시가 ‘연주록(聯珠錄)’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아홉 자녀들의 학문과 문학적 자질은 어머니 이옥재의 교육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이옥재의 여덟째 자녀 김호연재(1681~1722)의 9세손 송용억은 ‘호연재유고’ 영인본을 발간하면서 김호연재의 학문 연원이 모부인 이옥재에 기인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옥재는 남편과의 부부관계도 평등·조화로운 부부상을 실천하였다. 이와 같은 부부의 삶의 방식은 아홉 자녀의 인문적 감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묘갈명(墓碣銘)
공은 휘는 성달(盛達)@ 자는 백겸(伯兼)@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고려의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이 그 시조이다. 고조 휘 극효(克孝)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상용(尙容)은 우의정으로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호는 선원(仙源)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부 휘 광현(光炫)은 이조참판을 지냈다. 부친 휘 수민(壽民)은 덕산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효성으로 정려를 하사받았다. 모친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목사(牧使) 휘 형각(衡覺)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임오년(1642@ 인조20) 1월 20일에 태어났다. 아이 때부터 천성이 인후(仁厚)하였는데 성장해서는 마음이 너그럽고 선을 좋아하여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다분하니@ 당시의 선배와 친척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갑인년(1674@ 숙종1)에 처음 벼슬하여 효경전 참봉(孝敬殿參奉)@ 사도시 봉사(司䆃寺奉事)@ 도원도 찰방(桃源道察訪)@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진안 현감(鎭安縣監)에 제수되었다. 군은 한결같이 성신(誠信)과 인서(仁恕)로 백성을 대하고 정사를 행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것처럼 관직에 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하였고 이해를 따진 적이 없었다. 또 와서 별제(瓦署別提),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고성 군수(高城郡守)가 되었다. 영동(嶺東)에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공이 성심을 다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니 유망(流亡)하는 백성이 없었다. 그해(1696년) 8월7일에 관사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백성들이 달려와 호곡(號哭)하여 상여를 전송하였다. 10월에 양주(楊州)의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옥재:1643~1690)이니@ 정자(正字) 홍상(弘相)이 그 부친이다. 부인은 혜신(惠愼)하고 유정(幽貞)하여 옛적 열녀의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6년 먼저 졸하였다. 처음에 홍주(洪州)에 안장하였다가 임오년(1702)에 공의 묘소 왼쪽으로 옮겨 부장하였다.
공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시택(時澤)은 비안현감이고@ 다음은 시윤(時潤)ㆍ시제(時濟)ㆍ시흡(時洽)ㆍ시정(時淨)이며@ 급제(及第) 이명세(李命世)@ 종실(宗室) 밀성군(密城君) 이식(李栻)@ 이항수(李恒壽)@ 송요화(宋堯和)는 그 사위이다. 측실에게서 1남 3녀를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공은 가정에서는 효우(孝友)를 행하였고@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적에는 기쁜 안색으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형제와 화락하게 서로 잘 지냈으며@ 자손을 자애로 어루만지되 능히 잘 가르쳤고@ 노복을 대할 적에 인자하되 법도가 있었다. 청렴결백하게 벼슬살이하였고@ 허심탄회하게 남을 대하였으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가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항상 태연하여 근심스러워하는 안색이 없었다. 사람됨이 진실하여 거짓으로 꾸민 적이 없었고 염담(恬淡)하여 물욕이 적었으며@ 세상의 명리에 대해서는 더욱 마음을 두지 않았다. 평생 기쁨과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비방과 명예를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마음이 평탄하고 진솔하여 편견이 없다.” 하니@ 동배들이 이로써 공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시를 읊기를 몹시 좋아하여 거의 버릇이 되었는데 당시 문장의 대가들이 모두 탄복하여 왕왕 붓을 놓고 한 걸음을 양보하였다. 공은 또 산수를 좋아하여 더불어 승경지에 대해 말할 적에는 혹 침식을 잊기도 하였다. 거처하는 곳에 해산(海山)의 승경이 많았는데@ 매양 가절(佳節)이 되면 형제와 아이들 그리고 갓을 쓴 사람들과 그 가운데에서 소요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 〈오산곡(鰲山曲)〉을 짓고 동군(東郡 고성(高城))에 있을 때에 〈봉래곡(蓬萊曲)〉을 지어 뜻을 드러내었고@ 심지어 초연히 세상 사이의 표방(標榜) 밖으로 홀로 벗어나 매양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의(時議)가 분분하여 다툼이 막 일어나려 할 적에 홀로 베개를 당겨 설핏 잠에 빠져 듣지 않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의 자품이 남보다 월등히 세속을 벗어난 것이다. 시고(詩稿)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공과 척의(戚誼)가 있으니@ 공의 아들 시제(時濟)가 조카사위인데@ 이 역시 청고(淸高)하여 지조가 있다. 지금 형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공의 묘갈명을 청하기에 늙고 병들어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군의 선대는 / 嗟君家世
태산북두 같았고 / 如斗如山
아 군의 바탕은 / 嗟君性質
난옥 같았어라 / 如玉如蘭
강호는 거처였고 / 江湖家計
풍월은 벗이었으며 / 風月襟契
또 아름다운 배필 있어 / 亦有嘉耦
금슬로 친애하였도다 / 琴瑟其友
복록이 많을 필요 있겠는가마는 / 祿豈必多
수명이 길지 못함이 애석하구나 / 惜年不遐
아들과 손자들이 / 有子有孫
효성스럽고 재주 있으니 / 而孝而才
아직 남은 경사 있음을 / 尙有餘慶
장래에 징험할 수 있으리라 / 可徵方來

*묘갈명 작성자: 대사헌 우의정 판돈녕부사 파평인 명재 윤증(尹拯@1629~1714)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성달(盛達)
자(字)백겸(伯謙)
생(生)1642년 임오(壬午) 01월 20일
관직(官職)고성(固城)군수(郡守)
저서(著書)안동세고(安東世稿) 연주록(聯珠錄)
졸(卒)1696년 병자(丙子) 08월 07일
배(配)연안(延安) 이옥재(李玉齋)
생(生)1643년 계미(癸未) 월 일
졸(卒)1690년 경오(庚午) 06월 20일
묘(墓)청송리(靑松里) 선조(先兆) 아래
경좌(庚坐) 합폄(合窆)
 부(父)정자(正字) 홍상(弘相)
 조(祖)참판(叅判) 소한(昭漢)
 증조(曾祖)좌의정(左議政) 문충공(文忠公) 정구(廷龜)
 외조(外祖)영의정(領議政) 강석기(姜碩期) 본(本) 금천(衿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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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세16 세17 세18 세19 세
상용(尙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