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義兵將)  김대규(金大圭)


1905년 을사조약 늑결에 격분함을 금치 못하고 11월 17일 청송(靑松) 주치(周峙)와 울산(蔚山) 불영사(佛影寺)에서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의 지사들과 회합하여 의거의 기치를 올릴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지 규합을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살포하여 의병 5백 명을 모병하였다. 곧 그들에게 적절한 무술훈련을 실시하여 실전에 대비하였다.
1906년 2월 영양(英陽) 입암교동(立岩橋洞)의 자택에서 의진의 부서를 확정하고 김대규는 도포장(都砲將)에 피선되었다.
그 후 진보(眞寶) 오누지(池) 작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 무등(武藤)을 비롯한 적 수 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중 무등은 그 일대 의병탄압의 책임자로서 의병운동 전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자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므로 그 의의는 매우 컸다.
1906년 5월 울진 죽변 왜관 전투(蔚珍竹邊倭舘戰鬪)에서 적과 접전하여 크게 물리쳤다. 8월에는 잔류병력을 정비보강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장이 된 김대규는 휘하의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력을 보강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10월에 이르러 병왕동(屛王洞)에서 출동한 왜적을 맞아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하여 적에게 사면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안동(安東) 임동면(臨東面) 대곡(大谷) 태백산맥 일월산맥 등의 산악지대에 의지하여 적과 대치하여 교전을 하였다.
의진의 치열한 방어전에 견디지 못한 왜적들은 인근의 산악지대에 불을 놓는 방화작전(放火作戰)으로 대처하였다. 결국 김대규는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1907년 11월 2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동김씨대종중
눌재공(생명)파
대규(大圭)
자(字)순집(舜集)
호(號)학남(鶴南)
생(生)1878년 무인(戊寅) 11월 09일
상훈(賞勳)건국훈장독립장(1977)
 안동 출신. 一九○五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이에 비분하여 의거하였다.
 청송주왕사(周王寺)와 울진불영사(佛影寺)에서 이현규(李鉉圭)와 함께 경상
 도·강원도지방의 의병 五○○여 명을 모아 무술훈련을 실시하고 一九○六년
 二월에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의 교동에 있는 자택에서 의진을 구성하여 의
 병을 일으켰다.이 때 도포장(都砲將)으로 선임되었으며 그 해 四월 진보의
  오루저수지에서 일본헌병 부 토[武藤] 이하 一○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五월에는 울진·죽변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一一월에는 안동
 임동면과 영양 입암면의 접경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적의 방화로 순국하였
 다.
졸(卒)1907년 정미(丁未) 11월 21일
묘(墓)청송군 진보면 세장동(世長洞) 진보령(眞寶嶺) 서쪽 기슭 황곡(黃谷) 건
 좌에서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제397호로 이장
묘표(墓表)가 있다
배(配)안동권씨(安東權氏)
생(生)1876년 병자(丙子) 월 일
졸(卒)1927년 정묘(丁卯) 02월 07일
묘(墓)부(祔) 오른쪽에서 현충원으로 이장
합폄(合窆)
 부(父)필문(必文)
 조(祖)학부(鶴孚)
 증조(曾祖)범일(範一)
 외조(外祖)배선택(裵善澤) 본(本) 흥해(興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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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세23 세24 세25 세26 세
도순(導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