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삼대시기(朝鮮三代詩妓)  김부용(金芙容)


김부용(金芙蓉)의 호는 운초(雲楚) 일명(一名) 추수(秋水)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예술인이다.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몰락한 선비 추당(秋堂)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달하였다 한다.열 살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고 작은 아버지인 일화당(一和堂)에게 맡겨졌고 다시 퇴기(退妓) 설매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妓生)의 길을 걷게 된다.그리고 16세때 성천(成川)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
김부용이 연천 김이양(金履陽)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826년에 이미 공(公)이 봉조하가 되었으므로 1831년에 김부용을 만난것은 아마도 공(公)이 유람하시다가 만난것으로 보인다. 성천부사 유관준이 평양감사인 공(公)에게 소개했다는 설은 공(公)이 평양감사를 하신적이 없고 성천부사에 유관준이라는 사람은 없다.
일설에는 김이양이 57세 때인 1811년 12월 홍경래 난의 진압을 위해 함경감사에 부임하였다가 1815년까지 서북지방에 머물렀는데 이때 운초를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때 운초의 나이가 4살이므로 년대가 맞지 않다.
김운초가 관료 김이양의 첩실이 된 것은 신묘년(1831)이다. 이때 운초는 19세였고 김이양은 77세였다. 김부용의 시집 운초기완(雲楚奇玩) 말미에 지난 신묘년에 나는 칠십칠세이셨던 연천노인의 소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김이양의 졸년이 1845년임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으로 산 기간은 14년 정도 되고 부실(副室)이 되기 전 성천의 기녀 신분일 때부터의 기간까지 감안하면 대략 20년의 인연이다.
1832년 2월. 운초는 김이양을 따라 성천에서 한양으로 이주해 왔다. 남산 기슭에 오십칸짜리 기와집을 새로 짓고 후원에는 녹천당(綠泉堂)이라는정자를 지어 초당(草堂)이라 부르고 주변 사람들은 부용(芙蓉)을 초당(草堂)마마라 불렀다.
남편과 함께 한강 가의 별장 일벽정에 머물며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남편 벗들의 각종 연희에 참여하여 시·그림·음악·춤 등의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한양 최고의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여유와 자적의 문화 활동을 유감없이 만끽하였다.
김이양은 홍성 사람으로 김이양이 1843년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되는 회방년(回榜年)을 맞아 충청도 홍성·결성·천안 일대를 성묘할 때 부인의 예로써 행차에 함께하였다.
한양에서 예술활동을 할때 함께한 여성 예술인이 경춘(景春)·경산(瓊山)·금원(錦園)인데 운초처럼 기녀에서 소실이 된 예술인들이다. 운초는 이 소실 그룹의 친구들과 19세기 여성 예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특히 김운초·경산·김금원·김경춘·박죽서 등 다섯 명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시 동아리를 결성하여 문학의 창작과 감상 향유 활동을 주도하고 예술 문화계의 선두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동료와 그룹이라는 면에서 주목된다.삼호정은 규당 김덕희의 소실인 금원이 기거하던 정자로 지금의 용산 전자랜드 근처에 있었다.
현재 알려진 김운초의 시는 300여 수로 시집 운초기완 운초당시고 운초시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19세기 최고의 여성 예술가로 활동했던 김운초. 그녀의 삶은 화려한 듯 쓸쓸하였다. 운초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묻히길 소원하였다. 그녀의 뜻대로 천안 광덕산 기슭 김이양의 무덤 가까운 곳에 운초의 무덤이 허허롭게 있다.
운초의 무덤은 정비석 작가가 명기열전(名妓列傳)을 쓰면서 김부용의 묘를 찾기 위해서 광덕산아래 사는 서상욱(徐相旭)이라는 분을 만나 묘를 찾게 되었다고 묘를 찾는 과정을 부용 묘 제사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상사곡(相思曲)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羅巾有淚
紈扇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倚孤枕驚殘夢
望歸雲悵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頤
容貌憔悴對鏡下淚
歌聲烏咽對人含悲
提銀刀斷弱腸非難事
躡珠履送遠眸更多疑
昨不來今不來郎何無信
朝遠望夕遠望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騎來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別時多見時少世情無人可測
惡緣長好緣端天意有誰能知
雲雨巫山行人絶仙女之夢在某
月下鳳臺簫聲斷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頻倚牡丹峰每傷緣鬢衰
獨守空房淚縱如雨三生佳約焉有變
孤處深閨頭雖欲雪百年定心自不移
罷晝眠開紗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挽香衣送歌舞同春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如是耶
三時出門望出門望哀哉賤妾苦心果如何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孤魂月中泣長隨

이별하니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편지는 더딥니다.
생각은 거기 있고
몸은 여기 있습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아득합니다.
향각(香閣)에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 밤
연광정에 달이 솟아오르는 이때
고침(孤枕)에 의지하여 잔몽(殘夢)에 놀라 깬몸
고운(歸雲)을 바라보니 원이(遠離)가 슬프옵니다.
만나 뵈올 날을 날마다 수심으로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들고 턱을 괴어 우옵니다.
초췌해진 얼굴 거울을 대하니 눈물뿐이요
목소리도 흐느껴지니 사람을 기다리기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은장도 들어 약한 창자 끊어버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마음에는 의심도 많이 떠오릅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은 어찌 그리도 신용이 없으십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녁에도 멀리 바라볼 뿐이니 소첩만 홀로 속고 있나 봅니다.
대동강이 평지가 된뒤에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오시렵니까?
큰 숲이 바다로 변하거든 노를 저어 배를 타고오시렵니까 ?
이별할 때는 많고 만날 때는 적으니 세상 인정을 누가 가히 추측할 수 있으며 악연(惡緣)은 길고 호연(好緣)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능히 알 수 있겠습니까.
운우무산(雲雨巫山)에 행적이 끊겠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더불어 즐기시며 월하봉대(月下鳳臺)에퉁소 소리 끊겠으니
농옥(弄玉)의 정을 어느 계집과 나누고 계시나이까?
잊고자 해도 잊을 수없어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아깝게도 홍안(紅顔)은 늙어만 가고
생각지 말자 해도 생각이 절로 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게도 검은 머리만 쇱니다.
홀로 공방(空房)에 누우니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삼생(三生)의 가약(佳約)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웠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정심(百年定心)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오리까.
낮잠을 깨어 사창(紗窓)을 열고 화류소년(花柳少年)을 맞아 보아도 모두가 정 없는 나그네일뿐이요
옥침(玉枕)을 밀치고 향의(香衣)를 이끌며 춤도 추어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스러운 사내들 뿐이옵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君子)의 박정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시나이까.
삼시(三時)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는 애처로움 천첩의 고심이 과연 어떠하겠나이까.
오직 바라옵건대 관인(寬仁)하신 대장부께서는 결심을 하고 강을 건너 구연(舊緣)의 촛불 아래 혼연히 대해주셔서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아래에서 길이 울며 따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부용(芙容)
호(號)운초(雲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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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2 세-1 세1 세
범순(範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