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차문제(位次問題)


묘우에는 그 중심에 권태사를, 동쪽에 김태사, 서쪽에 장태사의 순서로 모셔져 있다. 묘우의 위차(位次, 배향 순서) 문제는 김, 권 양가에서 오랫동안 심각한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사당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쪽을 상위로 본다. 그렇다면 장태사가 수위(首位)다. 또한 세 분인 경우는 그 중심에 있는 분을 수위로 본다. 그렇다면 권태사가 중심이다. 안동 김씨들은 동쪽을 수위로 보아왔다. 그렇다면 김, 권, 장태사가 그 올바른 순서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위차 문제는 오랫동안 풀지 못한 퍼즐과도 같은 것이었다.

안동 김씨를 대표했던 인물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 선조3-1652, 효종3)이 권태사의 후손인 경주부윤 직에 있던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1569, 선조2-1631, 인조9)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시에 동쪽으로써 위를 삼았다면 김 태사께서 제일 위가 되고, 서쪽으로써 위를 삼았다면 장 태사께서 제일 위가 됩니다. 그런데 사신(史臣)들의 글 및 여러 서책에 기록된 바를 보면, 장 태사의 이름과 차서가 가장 낮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김 태사께서 마땅히 제일 위가 됨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술잔을 올리는 예를 보면, 가운데에 있는 권 태사께 가장 먼저 술잔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중간에 권씨의 자손들이 한번 제사를 지내면서 잘못 지낸 것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고치지 않은 데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합니다. 영형께서 어찌 예로부터 지금까지 가운데로써 위를 삼는다는 제도를 들어 보신 적이 있었겠습니까. 영형께서는 동쪽으로써 위를 삼는다는 것에 대해서 상고할 데가 없는 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영형의 말과 같다면, 한 줄로 늘어서서 앉아 있는 자리에서 장 태사는 이미 원공(元功)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땅히 어느 편으로써 위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제사를 지내서 조상을 추모하고 은혜를 갚는 것은 본디 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는 공경하는 것을 주로 하면서 순하게 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면서 차서를 어긋나게 한다면, 어찌 그것을 순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차리면서 순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공경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순하게 하지도 않고 공경스럽게도 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흠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청음 김상헌과 장곡 권태일의 논쟁이 있은 지 60년 뒤인 숙종8년(1682)에 조정에서는 일대 결단이 내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다.

안동부(安東府)에 고려(高麗)의 공신(功臣)인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의 삼태 사묘(三太師廟)가 있는데, 한 줄로 남쪽을 향하여 김선평은 동쪽에 있고, 권행은 가운데에 있고, 장길은 서쪽에 있다. 김선평·권행 두 집의 자손인 부호군(副護軍) 김수일(金壽一)·첨지(僉知) 권열(權閱)이 각각 상소하여 위차(位次)를 정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김수일은 동쪽이 수위(首位)라 하고 권열은 가운데가 정위(正位)라 하여 다투는 말이 매우 많았다. 일이 예조(禮曹)에 내려지자,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고려사(高麗史)·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태조 경인년에 고창 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드디어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하였고, 이황(李滉)의 기문(記文)에 '고려의 공신이 세 사람이니, 김공 선평(金公宣平) 권공 행(權公幸)·장공 길(張公吉)이다.' 하고, 또 '성주(城主)인 자는 김공(金公)이고 앞장서서 고려에 강복한 자는 권공(權公)이다.' 하였으니, 위차(位次)의 선후는 절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적(史籍)과 선유(先儒)의 말이 이러하니, 김선평을 수위로 하고 권행·장길을 차위로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安東府有高麗功臣金宣平權幸 張吉三太師廟, 一行南向, 而居東,權居中,張居西。金權兩家子孫副護軍金壽一、僉知權說各上疏, 請定位次上下,壽一則曰: "東是首位。"說則曰: "中是正位。" 爭說甚多。 事下禮曹, 禮曹覆啓曰: "《高麗史》《東國通鑑》麗 太祖庚寅, 以古昌城主金宣平爲大匡,權幸張吉爲大相, 遂以其郡爲 安東府 李滉記文有曰: 麗朝功臣三人, 曰金宣平權幸張吉。’ 又曰: ‘爲城主者金公, 倡降麗者權公。’ 則位次先後, 自可區別。 史籍及先儒之論如此, 宜以金宣平爲首,權張次之。" 上允之。

 

 

 

 

 

 

 

 

 

 

 

 

 

 

 

또 1767년 영조 43년 5월 7일 동돈녕부사 김시교가 헌작 차례를 바로 잡아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신들의 시조(始祖)인 고려(高麗)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은 태사 권행(權幸), 태사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조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안동부(安東府)에서 묘식(廟食)하고 있어 백세(百世) 동안 그 위차(位次)를 바꾸지 않고 작헌(酌獻)하는 데 스스로 일정한 차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권씨(權氏)의 자손들이 억지로 그릇된 의논을 창작(創作)해 내어 권공의 덕(德)이 두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항상 행하던 예를 마음대로 고쳐 마침내 제2위 중앙에 있던 권태사에게 차례를 건너뛰어 먼저 헌작하였으니, 일의 체면이 전도되고 어진 백성들이 못내 한탄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신의 족조(族祖) 고(故)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고 참판 권태일(權泰一)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변한 것이 매우 자세하며, 옛날 선조(先朝)에 신의 할아버지 고 돈녕 도정(敦寧都正) 신 김수일(金壽一)이 상소하여 첨지(僉知) 권열(權說)과 서로 논변하였습니다. 그때에 예당(禮堂)이 조목을 들어 회계하니, 우리 숙종 대왕께서 특별히 처분을 내려 신들의 시조를 수향(首享)으로 삼아 먼저 헌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년에 이르러 권유(權愈)등이 환설(幻說)을 상소하고 역적 민암(閔黯)이 또 종백(宗伯)으로서 꾸며서 복계(覆啓)하여, 마침내 이미 바로 된 예로 하여금 다시 잘못을 답습하는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심지어 묘비(廟碑)는 ‘권태사묘정비(權太師廟庭碑)’라 쓰고 제축(祭祝)은 ‘몇대손 헌작’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한 고을의 조두(俎豆)하는 곳이요, 또 공전(公田)을 특별히 내린 전례(典禮)가 있어 체계가 자별한데, 천년 가까이 사민(士民)이 공적으로 받들던 사원을 갑자기 변경하여 권씨 성들이 독단하는 사묘(私廟)를 삼았으니, 잘못된 일치고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고 판서권이진(權以鎭)은 비록 그 자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본부에 부임했을 때에 이런 잘못된 풍습을 보고는 축연히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즉시 첩(帖)을 내려 계칙(戒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권씨 성이 마음대로 공묘(公廟)를 변경하여 사묘(私廟)로 삼았으니, 함께 향사(享祀)하는 뜻을 모조리 잃게 되었고, 축문에 손(孫)이라고 일컫는 데에 이르러서는 예절과 사체가 당초 사당을 세운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김씨·장씨 두 태사(太師)가 어찌 사리(事理)에 어긋난 제사를 기꺼이 흠향하겠으며, 이미 기꺼이 함께 흠향하지 않는다면 우리 권 태사 역시 어찌 기꺼이 홀로 흠향하겠는가? 그 예의(禮義)에 있어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데도 여러 권씨들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병오년 봄에 신들이 여러 권씨들과 더불어 각기 변소(辨疏)를 진달하여 해부(該府)로 하여금 품재(稟裁)하라는 비답을 받았으나, 해조에서 복계를 아직껏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해조로 하여금 속히 회계(回啓)하게 하고 인하여 바로잡아 주소서." 하였다.

1908년 고종 38년 5월 13일

정2품 김석근(金晳根)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역적 견훤(甄萱)의 난리 때 고창(古昌)의 성주(城主)로서, 고을 사람인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고을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도와 역적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원수를 갚기를 장사도(張司徒)가 한(漢) 나라를 도와 원수를 갚은 것처럼 하니, 고려의 왕업이 이로 인하여 이룩되었고 그 일대가 보존되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는 공로를 논하여 벼슬을 제수하였는데,김선평은 대광(大匡)으로 삼고,권행과 장길은 다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작위는 태사(太師)라고 하였으며,고창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죽자,안동부의 백성들이 그들의 공덕을 생각해서 사당을 세우고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당 제도는 〖신주를〗 한 줄로 남쪽을 향해 배열하였는데, 김 태사의 신주를 동쪽에, 그 다음이 권 태사, 그 다음에 장 태사의 신주를 놓았습니다. 당시 동쪽을 상석(上席)으로 삼았으면 김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되고 서쪽을 상석으로 삼았으면 장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史官)의 기록이나 여러 책들의 기록에 의하면 장 태사의 명위(名位)가 제일 아래에 있는 만큼, 서쪽에 놓았다고 해서 미루어 상석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니 김 태사를 마땅히 제일 높은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애당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그 증수기(增修記)를 지어 말하기를, 안동부에서는 고려 왕조의 공신 3명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김공, 권공, 장공이다.’라고 하여 그 명위의 차례를 순전히 역사 기록만을 따르고 믿었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후세의 자손들이 낮춘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권 태사의 자손들은 공정한 논의를 생각지 않고 한갓 저들의 조상을 위해서 이황의 기문(記文)에서 질문에 대답한 말 중에 ‘주(主)’ 자에 대한 내용을 뽑아내고 주향(主享)과 주벽(主壁)의 의미로 해석하여, 저들의 조상에게 술을 먼저 붓는 잘못을 타당한 것이라고 망녕되이 증명하면서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조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황이 취한 정사(正史)의 정론을 한사코 버리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사를 거꾸로 지내는 잘못에 대해서는 일찍이 누차 분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영조(英祖) 정해년(1767)에 이르러 하교를 받아 바로잡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신주의 차례를 바꿔 놓은 읍지(邑誌)가 권씨 가문에서 다시 나왔는데, 그 인물편에서는 버젓이 권 태사를 첫째로, 김 태사를 그 다음으로 만들어 놓고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조상을 내세우기에 급급하기로서니 어찌 연석(筵席)에서의 하교를 공경스럽게 따라야 한다는 의리를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 일이 비록 개별적인 가문 간의 시비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가령 저 읍지가 세상에 공공연하게 나돌게 한다면, 성조(聖朝)께서 연석에서 하교하여 바로잡은 것이 장차 오래될수록 분변할 수 없을 것이고, 역대의 정사(正史)도 오래될수록 허언(虛言)이 될까 걱정이 됩니다. 이 읍지가 이미 간행된 이상 그 책 중에서 그 차례를 바로잡는 것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밝은 칙지를 내리셔서 분명하게 수정하도록 즉시 명령함으로써 선조께서 연석에서 하교한 것을 빛내시고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