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다. 이단상(李端相)의 문인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숙종 7) 김석주(金錫胄)의 천거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에 초선(抄選)되고 1721년(경종 1)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 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했다.

김창흡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김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김창흡은 『중용』의 미발(未發)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또한 인품(人品)을 6등으로 나누어 성인(聖人)·대현(大賢)·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삼연집(三淵集)』·『심양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書巖祠)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문과]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


삼연집(三淵集)

저자 : 문정공(상헌)파  창흡(昌翕)

생(生) : 1653.07.05

졸(卒) : 1722.02.21

계축(癸丑)진사(進士) 서연관(書筵官) 

조선후기 학자 김창흡의 시·서(書)·제문·일록 등을 수록한 시문집.
36권 18책. 목판본. 1753년 문인 유척기(兪拓基)가 간행하였다. 습유(拾遺) 32권이 따로 있다.
현손 달순(達淳)이 원집에 빠진 시문을 모아 연보 2권을 덧붙여 편집한 것을 종5대손 수근(洙根)이 1854년 간행하였다.
1976년 후손들이 이 문헌을 모두 영인하고 유상(遺像)·유필(遺筆) 및 사평(史評)과 가사(家史)를 덧붙여 출판한 바 있다.
1권1∼16에 시 권17∼22에 서(書) 권23에 서(序) 권24에 기 권25에 제발(題跋) 권26에 잡저 권27∼28에 묘지명 권29에 신도비명·묘갈명 권30에 묘표 권31·32에 제문 권33에 잡록·일록(日錄) 권34에 일록 권35에 일록·만록 권36에 만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습유의 권1∼11에 시 권12에 과체시(科體詩) 권13∼22에 서(書) 권23에 서(序)·기 권24에 제발·설·잡저 권25에 묘지명·묘표·행장·제문 권26에 제문·고문(告文)·잡록·일록 권27·28에 일기 권29에 만록 권30에 태극문답(太極問答) 권31에 어록 권32에 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는 연보가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실려 있다.권34 35의 일록은 그의 학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것를 보면 그는 중형인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이황(李滉)와 이이(李珥)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절충하는 태도를 보이며 당시 학계의 주된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인물성론(人物性論)에서는 김창협이 호론(湖論)을 지지한 것과는 달리 낙론(洛論)에 기우는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태극문답」에서는 태극이 이일분수(理一分殊; 이가 나누어져서 달라진 것)임을 말하고 주자(朱子)가 『중용』의 천명지위성장(天命之謂性章)에 대한 주(註)한 것에 의거하여 인성(人性)의 동이(同異)를 논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인품을 성인(聖人)과 대현(大賢)·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등 6등급으로 나누어 논하였다.어록 등에는 성리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이 깊이 있게 개진되고 있다.
유·불·도에 대해 논하면서 “대체로 유(儒)에 대한 말은 주자가 가장 자세하게 했고 우리 나라에서는 율곡이 가장 자세히 했다. 주자는 젊어서부터 그 도를 존중하고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다. 도 또한 그 말에 대하여 충분히 연구하여 나온 것이다. 나도 이 경계에 대하여 자못 소견이 있다.”고 하여 그의 학문연원을 밝혔다.
잡저에서는 당시 이현익(李顯益)이 금수(禽獸)의 도덕성편득(道德性偏得; 도덕성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다)을 주장한 것에 대해 “범과 늑대는 그 새끼를 사랑하지만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잔폭하고 벌과 개미는 군신관계가 있지만 효는 듣지 못하였다. 자(慈)와 충(忠)은 진실로 말살할 수 없지만 원초에 준 전(全)은 어찌 이에서 그칠 것인가.”라고 하여 인물성(人物性) 오상구득설(五常俱得說; 인의예지신의 오상은 함께 습득 됨)을 주장하여 반대하였다.
또 그 성선(性善)의 주장에 동조하여 논리를 개진하였다.
김창흡은 김창협과 함께 그의 문장은 정조가 그의 「일득록 日得錄」에서 우리 나라의 문체를 일변시켰다고 언급하였을 정도로 당대를 풍미하였고 시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 당대의 으뜸을 일컬었다.
그의 시에 대해 정조는 “맑고 메말랐다(淸而枯 청이고).”고 평하기도 하였다.
『삼연집』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있어 학술상·문학상 여러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창흡(昌翕)
자(字)자익(子益)
호(號)삼연(三淵)
시호(諡號)문강(文康)으로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이 많음을(道德博聞) 문(文)
이라 하고 근원이 깊어 흐름이 이어짐을(淵源流通) 강(康)이라 한다
생(生)1653년 계사(癸巳) 閏07월 05일
관직(官職)계축(癸丑)진사(進士)
서연관(書筵官)
저서(著書)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瀋陽日記)
 집의(執義) 진선(進善)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大臣)들이
  주청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좨주(祭酒)가 되었다.
졸(卒)1722년 임인(壬寅) 02월 21일
배(配)증(贈)정부인(貞夫人)경주이씨(慶州李氏)
생(生)1653년 계사(癸巳) 월 일
졸(卒)1706년 병술(丙戌) 08월 18일
묘(墓)포천시(抱川市) 포천동(抱川洞) 묘곡(卯谷)
 묘갈(碣)은 곡운공(谷雲公) 예서(隸)로 집자하였다. 묘지(誌)는 현손(
 玄孫) 매순(邁淳)이 지었다
신좌(辛坐) 합폄(合窆)
 부(父)정랑(正郞) 세장(世長)
 조(祖)참판(叅判) 시술(時術)
 증조(曾祖)부사(府使) 성남(星男)
 외조(外祖)문형(文衡) 김익희(金益熙) 본(本) 광산(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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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세16 세17 세18 세19 세
상헌(尙憲)